디지털 시대, 노동의 한 단면 : 영인본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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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노동사연구소 작성일15-05-14 15:39 조회2,025회 댓글0건본문
디지털기기의 발달이 사람의 노동에 편의를 제공한 것은 틀림없지만, 사람의 노동(labour)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일(work)도 제대로 진행될 수 없다는 것 – 이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종종 ‘이진법이라는 커뮤니케이션’을 사용하는 디지털 자료들이 수많은 노동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노동사연구소의 영인본도 그 예외는 아니다. 한 장짜리 유인물에서부터 수십 장의 문건과 자료집에 이르기까지의 스캔 작업은 단순하면서도 지루한 노동이었다. ‘기계화된 톱니바퀴사이를 지나다니듯’ 묘사된 『모던타임즈』가 영인본 작업을 하는 ‘디지털타임즈’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해당 페이지를 스캐너 위에 올려놓고 읽어낸 후 다음 페이지를 올려 다시 읽어 디지털화하는 작업의 반복 - 이 작업이 디지털 시대의 노동의 한 단면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가장 미숙한 건축가가 가장 뛰어난 벌과 구별되는 점은 실제로 건물을 세우기 이전에 머릿속에서 그 구조를 미리 구상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노동 과정의 마지막에는 노동을 시작할 때 노동자의 상상력 속에 이미 존재하던 결과가 나타난다.”고 서술한 바 있다. 구상과 실행의 통일.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도 우리의 노동은 여전히 ‘구상과 실행의 분리’라는 테일러주의 아래서 생산 활동을 담당하고 있다. 스캔을 담당하는 사람들, 분류를 담당하는 사람들, 범주를 나누고 재분류를 하는 사람들, 디지털화된 자료를 책으로 엮어내는 사람들.
영인본 작업은 ‘교환가치’를 위한 노동이 아니었다. 현대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상품은 그 교환을 통해 가치를 실현한다. 그러나 노동사연구소의 영인본 작업은 자본주의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 영인본 작업은 ‘교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용’을 위한 작업이었다. 따라서 영인본은 사용되지 않으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 노동사연구소의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시대의 노동’을 기꺼이 감내하고, 그 완성을 기뻐한 것은 이 자료가 사람의 ‘필요’를 위해 ‘사용’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몫은 ‘사용하려는 사람들’에게 있다.
마르크스는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동물도 생산을 한다. …… 동물은 일면적으로 생산하지만, 반면에 인간은 보편적으로 생산한다. …… 동물은 자신이 속해 있는 종(種)의 규준과 욕구에 따라서만 형태를 만들지만, 반면에 인간은 모든 종의 규준에 따라 생산할 줄 알고 어떤 경우에나 대상에 고유한 규준을 도모할 줄 안다.”고 서술한 바 있다. 영인본은 보편적이며, 미적(美的)이다. 어느 일방의 사용을 위해 생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편적이며,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기 때문에 미적이다. 영인본은 생산된 자료를 가공하지 않았다. 당시의 인식과 당시의 서술 방식과 당시의 표현 수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이진법의 커뮤니케이션’이 지배하는 현재에는 제대로 볼 수 없는 ‘필사된 글씨’를 볼 수도 있다. 필사된 글씨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영인본이 ‘미적 법칙’을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 줄 것이다. 그 미(美)를 느끼는 것도,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도 이제는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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