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사연구소 아카이브 활용사례 (장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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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노동사연구소 작성일15-02-27 14:05 조회2,527회 댓글0건본문
노동사연구소 아카이브 활용사례
장미현(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1. 2007년 봄
시간으로 보면 7년의 격차를 두고 있는 기간. 이 두 번의 시간이 내가 성공회대 노동사 연구소의 아카이브를 만난 때이다. 2007년 봄, 한창 석사 논문을 작성하고 있던 나는 1950년대 여성 노동자들의 ‘쟁의’를 연구해보겠다는 목표로 1950년대 대구대한방직노동쟁의를 연구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성공회대 노동사연구소 팀에서도 1950년대 노동자의 생애사, 일상사, 생활세계 연구가 나와 있는 형편이지만 당시만 해도 3무의 ‘1950년대 상’이 학계의 주류였다. 이른바, 1950년대 노동자(계급)이 있었어?1950년대 노동운동이 있었어? 더구나 여성 사업장의 노동쟁의가 있었어? 라는 의문이 자연스러운 시기였다. 당시만 해도 패기만만했던 나는 無에서 有를 발견하는 것이 역사학의 ‘소명’ 이라는 목표의식 하에 자료를 찾고 있었다.
예측 가능하게도 1950년대 여성 노동자의 의식, 생활세계를 다룬 자료와 연구는 잘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를 넘어 자연스럽게 노동자의 의식, 생활세계,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만난 「한국 산업노동자의 형성과 생활세계 연구」팀의 저작들이었다. 시기가 다르기는 하지만 이런 연구들이 이렇게 많이 나와 있다니. 여성 사업장의 노동자들, 빈곤여성의 모성실천 연구, 여성 노동자들의 정체성, 문화, 생활에 관한 내용들이 그 안에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이 연구 성과들은 방대한 노동자 구술작업을 통해 나온 것들이었다. 구술을 자료로 삼아 연구 성과를 낼 수 있다니. 대단히 충격을 받았다. 믿겨지지 않겠지만 역사학계에서는 바로 이 시점만 해도 주 자료로 구술 자료를 사용한다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학위논문에야 말할 것도 없었다.
현대사 연구자에게 구술이야말로 현대사의 독자적 ‘자료’ 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사 연구소의 연구 성과들을 만나기 이전 나는 이런 글쓰기에 대해 전혀 문외한이었다. 이 시기 노동사 연구소의 구술 자료들을 직접 활용할 수는 없었지만 연구 성과들은 자료의 부재로 막혀있던 나에게 새로운 글쓰기 방식을 가르쳐 주었다.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은 나는 대구대한방직쟁의 관련자들에 대한 구술 인터뷰를 찾아보게 되었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진행한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관련자들의 구술을 찾을 수 있었고 이 자료는 내 논문의 주 자료가 되었다.
이후 7년의 기간은 구술 자료를 활용한 노동사 연구를 스스로 시도해본 시기였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주관하는 구술자료 수집 사업에 참여하였고 역사학계에서도 구술 자료를 활용한 노동사 연구 성과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이 과정에서도 노동사 연구팀의 구술 자료는 나에게 ‘대척점’ 이었다. 노동사 연구소의 구술 자료는 노동운동이 치열(?)했던 사업장 중심이고 이 사업장의 활동가들 중심으로 구술이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같은 시대의 다른 노동자들의 경험을 복원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내 안에 형성되었다. 가령 노동운동이나 노동조합 활동에 어느 정도 관여했던 노동자들이 아니라 정권과 기업에 대단히 순응했던 노동자들의 의식, 생활, 기억은 어떠했는지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다. 결과적으로는 마산 수출자유지역의 남성 노동자, 노동청 공무원들, 기능올림픽 입상 노동자들의 생애사 구술 작업을 진행했다. 이 속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이룩한 생애 성장을 대단히 뿌듯하게 구술했다. 국가에 대해서도 탄압과 억압의 주체라는 인식보다는 자신과 가족의 생계와 성장을 위한 기회 제공자, 경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해 준 이로 기억되고 있었다. 인천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수난’이나 전태일에 대해서도 모른다는 외면보다는 1960~70년대의 노동자들이 민주노조활동 중심의 노동사 속 여성 노동자들과 같지 않다는 점을 적극 주창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노동사 연구소의 연구 성과를 꽤나 의식했던 거 같다. 나에게 있어 노동사 연구의 주류는 노동사 연구팀에서 주목한 (비판적)노동자들의 생애사, 일상사, 생활세계였고 이런 점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노동자들의 정치인식, 노동운동에 대한 인식, 기업형 인간이 되는 과정을 추적해 이를 비판하는 것이 노동사 연구팀의 연구 성과를 뛰어넘는 것이라고 위안 삼았다.
2. 의문과 고백
그런데, 내가 노동사 연구소의 노동연구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일까? 왜 나는 내가 진행한 구술 자료만 활용할 생각을 가지고 ‘그들’이 구축한 아카이브는 활용할 생각을 못했을까? 부끄럽지만 여기에는 역사 연구자로서의 사료 발굴 ‘욕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역사 연구자에게 ‘훌륭한’ 사료란 연구의 8할을 좌지우지 한다는 생각했고 새로운 자료를 발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연구 성과가 나온 자료는 활용할 가치가 낮다는 생각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성공회대 노동사 연구소의 아카이브는 굉장히 훌륭하지만 이미 내부의 연구자들이 활용한 자료에 불과하고 한 자료에서 여러 연구 성과들이 도출된 이상 이 자료를 그대로 활용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 균열이 생긴 것은 김원, 남춘호의 광산 노동자 구술 사료 활용과 동료 연구자 임광순의 연구를 보면서였다.
2013년부터 2014년까지 산재보험제도 연구를 했던 나는 산재가 빈번했던 광산 노동자의 산재 보험 처리 경험이 궁금해 김원과 남춘호의 구술 녹취록을 보게 되었다. 이 구술작업에서 연구자가 주목한 바는 유명무실한 산재보험제도에 대한 구술자들의 인식이었지만 나에게 읽힌 부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재보험금을 타기 위해 이들이 취한 행위와 전략이었다. 이 경험은 같은 자료를 볼 때 연구자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는 것처럼 구술 아카이브 또한 그 자체가 선택되고 기록되고 활용되고 망각되는 과정을 통해 생산된 사료라는 점을 일깨워줬다. 구술을 활용한 연구 성과가 아니라 구술 녹취록 그 자체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료가 중요한 역사 연구자에게 아카이브의 자료는 그 자체로 노다지에 다름없다. 역사 연구자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쏟는 작업이 자료 검색, 수집 과정이다. 구술 작업은 그 자체가 인간의 역사 이해 과정으로 역사 연구의 과정과 많이 닮아 있다. 구술은 쉽고 편한 작업이 아니다. 주제에 대한 이해, 구술자 선정과정, 구술자를 둘러싼 구조와 사건 조사, 구술 과정 중 구술자가 취하는 소극적· 적극적 방식을 민감하게 의식해 대화를 이끌어나가야 한다. 한 명의 면담자가 진행할 수 있는 구술은 일 년 내내 해도 10여명을 넘기 어렵다. 그런데 노동사 연구팀은 노동자 구술의 베테랑들을 모두 모아 3년간 360명의 작업을 진행했다.
앞서 언급한 임광순도 그 자신이 수행한 구술 작업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일 장면을 노동사 연구팀의 구술 녹취록에서 발견해 노동조합의 공장새마을 운동 활용 사실을 규명할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 나는 적어도 노동사 연구에 있어서만큼은 네이버 라이브러리가 인터넷을 통해 한국의 신문을 전 세계 연구자들에게 제공한 정도의 공로를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다른 구술 사업팀들이 구술 작업의 특징 상 시도하지 않는 집단 구술의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집단구술은 동일 사건에 대한 집단 내부의 기억이 다양하고 ‘다름’ 그 자체가 왜 발생하는 지,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추적할 것을 요구한다. 집단구술 자료를 통한 연구는 노동사 연구 내에서조차 흔치 않다. 새로운 방식으로 창출된 새로운 자료가 노동사 연구자들 앞에 놓여 있다.
3. 다시 2014년 겨울.
지금 나는 직업훈련과 기능대회를 통한 노동자 양성 정책과 기능 노동자들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1970년대 직업훈련은 기능 노동자 양성을 위한 대표 방안으로 활용되었다. 직업훈련이 경제개발계획 특히 중화학 공업화에 발맞춰 인력수급을 조절하기 위해 추진되었다는 점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부가 적극 주도한 직업훈련제도 내부의 기능 노동자들이 가졌던 경험, 생활, 의식은 그다지 조명 받지 못했다. 직업훈련에는 재직 노동자 대상의 재훈련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주로 청소년들을 상대로 이루어졌다. 기능대회는 학생과 현직 노동자 모두를 상대로 한 경진대회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가 노동자들을 작업장에 안착시키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역으로 노동자들은 이러한 제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고 어떻게 활용하고 있었을까? 이런 점은 제도를 선전하기 위한 수기를 통해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직업훈련기관과 기능대회를 경험한 노동자들의 구술을 통해 그들의 인식과 경험을 복원시키는 과정을 거쳐야 면모를 드러낼 것이다.
2014년 겨울, 이런 이유로 나는 다시 노동사 아카이브를 찾아갔다. 360여명의 노동자 구술 중 사내 직업훈련소 출신자들의 경험이 들어있지 않을까? 사업장 내부의 기능경진대회에 참가한 노동자들의 경험이 구술되어 있지는 않을까? 목적이 분명해지니 아카이브의 자료들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대기업 노동자들의 구술 속에서 뭔가가 반짝, 보였다.
4. 에필로그
지면의 제약으로 너무 노동사 아카이브의 기계적 ‘활용’ 경험에만 치중해 글을 작성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익히 알고 계시는 분들께는 사족이겠지만 구술은 지면에 서술된 문자 자료와 다르다. 설사 녹취록의 형태로 보더라도 구술은 자료가 아닌 ‘인간’ 그 자체이다. 지면을 통해서만 만나는 자료와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대화하며 창출된 구술 자료는 다르다. 이 점에서 나또한 구술을 단지 내 연구를 위해 부분적이고 파편적으로 이용하려는 ‘욕구’를 조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이런 태도가 시간과 노력을 들인 구술자와 면담자 선생님에 대한 예의라는 점을 잊지 않으려 한다.
이러한 자세만 견지한다면 노동사 연구소의 노동사 아카이브는 꿰어지지 않은 구술이다. 누가 예쁘게 잘 꿸 수 있냐에 따라 보배가 될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내 주변의 울산과 인천의 지역 노동자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동료 연구자들조차도 지역과 노동에 대한 구술자를 새로 찾아 구술하고 있다. 인천과 울산은 노동사 아카이브 속 핵심 지역이다. 이 자료를 먼저 검토한다면 향후 반복되는 구술 작업을 피하거나 새로운 구술 작업을 수행할 때에도 큰 도움이 될 텐데 그렇지 못하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일단, 노동사 아카이브의 구술자 명단과 간단한 이력이라도 웹 서비스를 통해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노동사 아카이브의 내용은 방대하지만 현재와 같은 구조상 성공회대까지 와서 목록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은 자료에 대한 접근을 제약하고 있다. 현재 추진 중인 아카이브의 웹 서비스 제공이 빠른 시일 내에 구축될 필요가 있겠다.
그리하여 연구자와 노동사 아카이브가 구술을 꿰어 보배로 만들어 내는 날, 노동사 연구가 반짝 빛날 날(日),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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