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칼럼> 인도의 다양성과 잠재력 / 이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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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노동사연구소 작성일13-06-01 15:39 조회2,56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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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로 칼럼>인도의 다양성과 잠재력(2005년 04월 29일 [내일신문])
이 종 구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모처럼 기회가 생겨 짧은 인도 여행을 하게 되었다. 첫번째 기착지인 남부지방의 첸나이 공항에 내리자 찐득찐득하고 후끈한 공기가 느껴졌다. 영락없이 한국의 7월말이나 8월초에 해당하는 날씨였다. 단체 관광버스 기사가 흰 꽃으로 만든 화환을 하나씩 걸어 주었다, 사람이 많고 임금이 싼 지역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 가이드가 영국인들이 이 도시의 이름을 마드라스라고 멋대로 바꾸어 놓은 것을 몇 년 전에 첸나이로 원상 회복시켰다고 설명해 주었다. 즉, 과거청산 작업을 통해 캘커타는 콜카타, 봄베이는 뭄바이로 본명을 되찾았다고 한다. 가이드는 루피 지폐에 영어를 포함한 16개 언어가 인쇄되어 있다는 사정도 알려 주었다.
첸나이의 거리 풍경은 복작거리지만 생기가 있었다. 언어 환경을 반영해 간판에는 모두 영어와 현지어가 병기되어 있었고 돈 내고 전화를 쓰게 하는 가게가 많았다. 60년대 서울에서 볼 수 있었던 삼륜차가 택시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아이 어른 포함해 대여섯 명은 거뜬하게 타고 다니고 있었다. 각종 차량이 경적을 끊임없이 울리면서 다니는 것도 특이한 광경이었다. 깜박이 대신에 경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달린다.
첸나이에는 현대자동차 공장이 있었다. 국내에서는 단종된 비스토를 상트로라는 이름으로 만들고 있었다. 설명을 들어보니 정규직 생산 노동자의 연봉이 500만원 수준에 불과하고 현지 노동법에는 국내와 같이 시간외 수당을 150% 할증해줄 의무도 없다고 한다. 작업 현장에는 아프렌티스(견습)라는 글자가 새겨진 옷을 입은 청소년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공고 실습생이기 때문에 보수를 월 2만5천원 정도 받고 있었다. 간단하게 말해 국내 임금의 10분의 1 이하를 받고서도 일하겠다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60년대말 70년대초 한국과 비슷
이러한 광경을 보면서 필자도 밥만 먹을 수 있으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고 무작정 상경하는 이농민이 넘쳐나던 1960년대 후반이나 1970년대 초반의 한국을 떠올렸다. 인도가 저가 공산품의 세계적 공급 기지로 떠오르는 것은 시간 문제에 불과한 것이다.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첸나이의 해변사원에서 기원후 8세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석조 건축물을 둘러 보았다. 지각 변동으로 땅속에 파묻힌 고대 왕국의 수도라고 한다. ‘다섯 사원’이라는 곳은 커다란 바위 하나를 까내려 사원 5개를 만든 기원후 7세기의 유적인데 신과 동물의 부조가 생동감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 곳도 역시 매몰되었다가 200여년 전에 네델란드인이 발굴하였다고 한다.
델리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에 오르니 첸나이에서 본 인도인과는 완전히 다르게 생긴 승무원들이 있었다. 첸나이의 드라바다인은 키기 작고 호리호리해 동남아 사람과 비슷한데 승무원들은 키가 크고 코가 높고 피부도 흰색에 가까웠다. 아무래도 아리안족 계통인 듯 했다. 델리에서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까지 250키로의 거리를 가기 위해 버스를 무려 6시간이나 탔다.
우리가 병자호란을 겪었을 시절에 건축된 타지마할을 보니 멋도 있었지만 규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인도의 물리학과 수학은 세계 최고의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인도 대륙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며 핵무기와 인공위성도 개발하고 최근에는 IT로 명성을 떨치는 일이 생기는 것도 역사적 저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타지마할을 건축한 샤자한 왕은 쿠데타를 맞아 아그라성에 유폐된 채로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성에서 과거청산에 투철한 한국인의 심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보았다. 영국이 1857년에 일어난 인도인 병사들의 반란에서 죽은 총독의 묘를 궁전 마당 한복판에 만들어 놓았는데 이것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물론 일행들은 ‘왕궁 한복판에 묘를 쓰다니, 이렇게 나쁜 놈들이 있느냐’고 비분강개 했지만 정작 인도 관광객들은 담담한 표정들이었다.
정신수양 통해 영국 물리친 인도
귀국 직전에 델리 중심가를 둘러 보았다. 대통령궁 주변은 완벽한 유럽식 도시였다. 그러나 한 불록만 돌아가자 거리에 누워 자는 사람 투성이였다. 노점상도 많고 걸인도 많았지만 서점의 책값이 믿을 수 없이 싼 점도 재미있었다.
인도에 대한 인상은 다양성으로 가득 찬 사회라는 것이었다. 인종, 언어, 종교가 천차만별인 인도인을 하나로 묶어 독립운동을 조직한 간디의 위대함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의 수양을 통해 영국을 물리친 인도가 물질 세계에서도 잠재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세계 사회의 구도가 달라질 것이 틀림없다.
이 종 구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모처럼 기회가 생겨 짧은 인도 여행을 하게 되었다. 첫번째 기착지인 남부지방의 첸나이 공항에 내리자 찐득찐득하고 후끈한 공기가 느껴졌다. 영락없이 한국의 7월말이나 8월초에 해당하는 날씨였다. 단체 관광버스 기사가 흰 꽃으로 만든 화환을 하나씩 걸어 주었다, 사람이 많고 임금이 싼 지역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 가이드가 영국인들이 이 도시의 이름을 마드라스라고 멋대로 바꾸어 놓은 것을 몇 년 전에 첸나이로 원상 회복시켰다고 설명해 주었다. 즉, 과거청산 작업을 통해 캘커타는 콜카타, 봄베이는 뭄바이로 본명을 되찾았다고 한다. 가이드는 루피 지폐에 영어를 포함한 16개 언어가 인쇄되어 있다는 사정도 알려 주었다.
첸나이의 거리 풍경은 복작거리지만 생기가 있었다. 언어 환경을 반영해 간판에는 모두 영어와 현지어가 병기되어 있었고 돈 내고 전화를 쓰게 하는 가게가 많았다. 60년대 서울에서 볼 수 있었던 삼륜차가 택시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아이 어른 포함해 대여섯 명은 거뜬하게 타고 다니고 있었다. 각종 차량이 경적을 끊임없이 울리면서 다니는 것도 특이한 광경이었다. 깜박이 대신에 경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달린다.
첸나이에는 현대자동차 공장이 있었다. 국내에서는 단종된 비스토를 상트로라는 이름으로 만들고 있었다. 설명을 들어보니 정규직 생산 노동자의 연봉이 500만원 수준에 불과하고 현지 노동법에는 국내와 같이 시간외 수당을 150% 할증해줄 의무도 없다고 한다. 작업 현장에는 아프렌티스(견습)라는 글자가 새겨진 옷을 입은 청소년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공고 실습생이기 때문에 보수를 월 2만5천원 정도 받고 있었다. 간단하게 말해 국내 임금의 10분의 1 이하를 받고서도 일하겠다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60년대말 70년대초 한국과 비슷
이러한 광경을 보면서 필자도 밥만 먹을 수 있으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고 무작정 상경하는 이농민이 넘쳐나던 1960년대 후반이나 1970년대 초반의 한국을 떠올렸다. 인도가 저가 공산품의 세계적 공급 기지로 떠오르는 것은 시간 문제에 불과한 것이다.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첸나이의 해변사원에서 기원후 8세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석조 건축물을 둘러 보았다. 지각 변동으로 땅속에 파묻힌 고대 왕국의 수도라고 한다. ‘다섯 사원’이라는 곳은 커다란 바위 하나를 까내려 사원 5개를 만든 기원후 7세기의 유적인데 신과 동물의 부조가 생동감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 곳도 역시 매몰되었다가 200여년 전에 네델란드인이 발굴하였다고 한다.
델리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에 오르니 첸나이에서 본 인도인과는 완전히 다르게 생긴 승무원들이 있었다. 첸나이의 드라바다인은 키기 작고 호리호리해 동남아 사람과 비슷한데 승무원들은 키가 크고 코가 높고 피부도 흰색에 가까웠다. 아무래도 아리안족 계통인 듯 했다. 델리에서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까지 250키로의 거리를 가기 위해 버스를 무려 6시간이나 탔다.
우리가 병자호란을 겪었을 시절에 건축된 타지마할을 보니 멋도 있었지만 규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인도의 물리학과 수학은 세계 최고의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인도 대륙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며 핵무기와 인공위성도 개발하고 최근에는 IT로 명성을 떨치는 일이 생기는 것도 역사적 저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타지마할을 건축한 샤자한 왕은 쿠데타를 맞아 아그라성에 유폐된 채로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성에서 과거청산에 투철한 한국인의 심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보았다. 영국이 1857년에 일어난 인도인 병사들의 반란에서 죽은 총독의 묘를 궁전 마당 한복판에 만들어 놓았는데 이것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물론 일행들은 ‘왕궁 한복판에 묘를 쓰다니, 이렇게 나쁜 놈들이 있느냐’고 비분강개 했지만 정작 인도 관광객들은 담담한 표정들이었다.
정신수양 통해 영국 물리친 인도
귀국 직전에 델리 중심가를 둘러 보았다. 대통령궁 주변은 완벽한 유럽식 도시였다. 그러나 한 불록만 돌아가자 거리에 누워 자는 사람 투성이였다. 노점상도 많고 걸인도 많았지만 서점의 책값이 믿을 수 없이 싼 점도 재미있었다.
인도에 대한 인상은 다양성으로 가득 찬 사회라는 것이었다. 인종, 언어, 종교가 천차만별인 인도인을 하나로 묶어 독립운동을 조직한 간디의 위대함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의 수양을 통해 영국을 물리친 인도가 물질 세계에서도 잠재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세계 사회의 구도가 달라질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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