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K1단계:3차년도 | [기사] 나이키와 빼앗긴 30분 : (주)풍영 여성노동자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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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노동사연구소 작성일13-06-14 16:30 조회4,916회 댓글0건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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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와 빼앗긴 30분 : (주)풍영 여성노동자 투쟁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부산의 신발 공장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고무 공장으로 형성되어 1960-7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70년대 어린 여성 노동자들은 섬유, 가발, 신발 공장에서 일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수출 증대의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1981년 ㈜풍영에서 미국의 나이키 회사와 손을 잡고 운동화 생산을 시작하였다. 당시 신문을 보니 이 일은 신발 생산 업계의 판도를 뒤흔들 사건으로 예견되었다. 실제 전 세계적으로 나이키 바람은 거셌다. 노동자들이 만든 신발은 전량 수출되었고 질 좋은 한국산이라는 평이 났다. 프로스팩스, 아티스로 유명한 재계 순위 7위였던 국제그룹이 경영상의 문제, 전두환 정권과의 문제로 일주일만에 공중분해 되면서 신발생산 하위 업체였던 ㈜풍영은 1989년 부산에서 규모 7위의 신발 제조업체, 전국 100대 기업으로 진입하였다.
나이키 국내 제작 시작을 알리는 신문기사(경향신문 1981.8.27)
㈜풍영은 화승기업의 대표적 기업으로 1981년 나이키 운동화를 연간 40만 켤레를 생산할 수 있도록 본사, 2공장, 3공장 생산라인을 갖췄다. 일하는 노동자만도 6,500명이었다.
나이키 수출이 최고치에 달해 가장 신바람 가도를 달리던 1985년 ㈜풍영의 여성 노동자는 기능공이 일당 3,300~4,200원으로 기본급 10만 원 이하를 받았고, 보조공은 최하 2,540원을 받았다. 이 임금은 같은 업종의 타사에 비해 일당이 300~400원 낮은 수준이었고, 그나마 보너스 300%를 받을 수 있기에 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노동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였다. 이 중간에 점심시간 1시간이 있다. 연장근로 1시간은 늘 있는 일이었다. 부산지역 신발공장의 노동자들은 어디고 다 이 정도 일을 기본으로 했다. 밤10시까지 잔업은 한 달에 네 번에서 많게는 여덟 번을 했다. 야간작업도 많았는데 한 달에 세 번정도 새벽 서너 시까지 일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새벽 6시 반까지 출근하였다.
㈜풍영 노동자들의 점심시간은 30분이었는데 1985년 6월 노동자들은 투쟁으로 1시간 점심시간을 쟁취한 것이다.
㈜풍영에도 노동조합이 있고 조합원들은 월 1,300원의 조합비를 꼬박꼬박 냈지만 노동자 권익을 위해 노동조합이 하는 일은 없었다. 노조가 하는 일은 ‘근로자의 날’ 수건이나 비누를 나눠주고 야유회나 교육 때 음료수를 노조 재정으로 보조하는 정도였다. 위원장은 장기집권을 하고 있었고, 전직 경찰관이었다. 조합원이 노동조합에 단체협약을 보러 가거나 회사에 대한 불만을 의논하러 가면 노조 간부들은 수사관처럼 굴었다.
< 사진: STV 부산여성사진전>
1985년에 임금이 인상되었다. 하지만 분명히 11% 인상되었다고 했는데 임금이 인상 전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유가 뭔가 따져 보니 그동안은 오전 8시부터 6시 30분까지, 8시간 근무를 기본으로 점심시간을 30분으로 계산하여 연장 2시간분에 대한 수당이 나왔는데 30분이 줄어든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항의에 회사 관리자는 “실제 일 한 시간은 9시간 반이다. 점심시간이 1시간이다.”라고 했다. 노조는 회사의 방침을 그대로 인정하였고 위원장도 회사 관리자와 같은 말을 했다. “점심시간 1시간은 불만 있는 자들이 단결해서 찾아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당시 대의원 선거는 공고도 제대로 하지 않고 조합원들이 알지도 못한 채 치러지기가 일쑤였다. 출마도 주임이나 반장들이 했고, 조장들의 무더기 투표로 대의원이 선출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평조원이 출마하여 당선되는 일은 거의 드문 일이었는데 7과에서 제화공 하봉순이 주임이나 반장을 누르고 대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후 하봉순은 관리자에게 ‘간첩’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억누르기만 해서 노동자들의 분노가 잠재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간첩’을 대의원으로 선출한 7과, 그리고 공정선거 시비가 붙어 실랑이를 벌였던 1과, 2부의 야학 출신들이 주도하여 30분 수당 지급에 대한 서명운동이 서서히 시작되었다.
여기에 회사에서 기름을 부었다. 서명운동을 눈치채고 1과 노조 대의원 후보였던 노득현을 가명으로 입사하였다는 사유로 해고시킨 것이었다. 노득현은 대의원대회장에 ‘나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세요’라는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였다. ㈜풍영에 나돈 최초의 유인물이었다. 며칠 후 ‘우리의 30분을 돌려달라’는 유인물이 현장에 돌기 시작하였다. 현장은 술렁거렸고 우리가 뭔가 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416명의 조합원이 서명하여 6월 1일 “4, 5월분 30분 연장수당을 지급하라, 점심시간을 규정대로 1시간으로 해달라, 기본급을 정부시책에 맞게 10만 원 이상으로 재인상 해달라”는 요구를 담아 노동부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점심시간은 즉각 1시간으로 조정되었다.
사건이 이렇게 마무리될 줄 알았지만 회사의 부당노동행위가 계속되면서 일이 커졌다. 서명대표자들이 노조 사무실로 몰려갔다. 노조가 책임지고 해결하고 회사에 압력을 가하라고 요구했다. 위원장은 “너희들은 법 다 지키고 사느냐, 근로기준법도 회사 사정에 따라 못 지킬 수도 있지.”라며 회사를 옹호했다. 다음 날 노조사무실에 위원장 면담을 하러 갔던 8명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노조위원장이 “해결하도록 노력하겠다.”고 해서 8시간 만에 면담을 마치고 돌아왔건만 회사에서 이들에게 사직서를 강요하고 하루 종일 사무실에 감금하여 협박하였다. “머리채를 뜯어서라도 쫓아내라.”
사직자들은 ‘강제사직 철회하라!’, ‘어용노조 물러가라!’는 유인물을 배포하며 출근투쟁을 시작하였으며 한편으로 각 기관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전원 복직, 4, 5월분 연장수당 지급을 요구하며 회사와 교섭을 하기도 했지만 회사는 노동부와 경찰의 편파적 태도에 힘입어 점점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더니 결국 재입사도 안 된다는 통보를 하였다.
해고자 중 두 명은 노동부 북부출장소 근로감독관의 출석요구에 갔다가 경찰서에 연행되어 ‘유언비어 날조죄’로 구류에 처해지기도 했다. 해고자들은 [풍영소식]을 작성하여 배포하고 일일찻집을 열어 현장 노동자와의 연계고리를 만들려고 하였다. 일일찻집에는 회사 관리자, 기관원, 경찰이 더 많이 왔다. 이들은 참가자 리스트를 작성하고 다방 주인을 협박하여 일일찻집 개최는 결국 무산되었다.
< 당시 기사는 풍영 여성 노동자의 요구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고 위장취업 문제를 기사화했다.
_ 동아일보 1985.8.22>
이들의 투쟁에 관심을 갖고 함께한 단체는 1983년 생긴 ‘여성평우회’ 정도였다. 여성평우회는 노조의 방해를 뚫고 조합원들이 앞장서서 벌인 30분 쟁취투쟁 사례를 퍼뜨렸고 해고자들과 ‘노동3권 보장하라’며 거리행진을 함께 시도하다가 연행되기도 하였다.
7월말, 회사는 그동안 지급하지 않던 수당을 하기휴가 보너스 명목으로 1인당 15,000원~25,000원을 지급하였다. 현장은 승리의 기쁨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동조자’의 강제해고가 속출하였다. 강제잔업 연장근로를 반대하던 노동자, 진정서를 배포하던 노동자들이 이력서 허위 기재 등 갖은 이유로 해고당하였다. 관리자들은 불만을 이야기하는 여성 노동자를 불범감금, 폭행하였다. 신문에서는 ㈜풍영의 위장취업자 해고 기사를 내보냈고 회사는 이를 통해 현장 노동자와 해고자들의 고리를 끊으려 하였다. 투쟁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회사가 수를 쓴 것이다. ‘위장취업’이라며 투쟁에 앞장섰던 노동자를 축출하였고, 이들과 함께했던 이들을 사직하게 만들었다. 해고자들의 투쟁은 계속되었고 노동자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풍영 노동자들의 투쟁은 많은 해고자들을 낳고 현장으로부터 고립되는 결과를 낳았지만, 노동자들의 단결로 점심시간 30분을 쟁취함으로써 실질적 임금인상을 이루었고 투쟁하면 된다는 가능성을 심어준 부산 신발공장 최초의 승리였다.
출처: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부산지역실태와 노동운동], 민중사, 1986.
경향신문 1981.8.27.
동아일보 1985.8.22
매일경제 1989.9.11.
나이키와 빼앗긴 30분 : (주)풍영 여성노동자 투쟁
정경원(노동자역사 한내 연구위원)
부산의 신발 공장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고무 공장으로 형성되어 1960-7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70년대 어린 여성 노동자들은 섬유, 가발, 신발 공장에서 일하며 가족을 부양하고 수출 증대의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1981년 ㈜풍영에서 미국의 나이키 회사와 손을 잡고 운동화 생산을 시작하였다. 당시 신문을 보니 이 일은 신발 생산 업계의 판도를 뒤흔들 사건으로 예견되었다. 실제 전 세계적으로 나이키 바람은 거셌다. 노동자들이 만든 신발은 전량 수출되었고 질 좋은 한국산이라는 평이 났다. 프로스팩스, 아티스로 유명한 재계 순위 7위였던 국제그룹이 경영상의 문제, 전두환 정권과의 문제로 일주일만에 공중분해 되면서 신발생산 하위 업체였던 ㈜풍영은 1989년 부산에서 규모 7위의 신발 제조업체, 전국 100대 기업으로 진입하였다.
나이키 국내 제작 시작을 알리는 신문기사(경향신문 1981.8.27)
㈜풍영은 화승기업의 대표적 기업으로 1981년 나이키 운동화를 연간 40만 켤레를 생산할 수 있도록 본사, 2공장, 3공장 생산라인을 갖췄다. 일하는 노동자만도 6,500명이었다.
나이키 수출이 최고치에 달해 가장 신바람 가도를 달리던 1985년 ㈜풍영의 여성 노동자는 기능공이 일당 3,300~4,200원으로 기본급 10만 원 이하를 받았고, 보조공은 최하 2,540원을 받았다. 이 임금은 같은 업종의 타사에 비해 일당이 300~400원 낮은 수준이었고, 그나마 보너스 300%를 받을 수 있기에 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노동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였다. 이 중간에 점심시간 1시간이 있다. 연장근로 1시간은 늘 있는 일이었다. 부산지역 신발공장의 노동자들은 어디고 다 이 정도 일을 기본으로 했다. 밤10시까지 잔업은 한 달에 네 번에서 많게는 여덟 번을 했다. 야간작업도 많았는데 한 달에 세 번정도 새벽 서너 시까지 일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새벽 6시 반까지 출근하였다.
㈜풍영 노동자들의 점심시간은 30분이었는데 1985년 6월 노동자들은 투쟁으로 1시간 점심시간을 쟁취한 것이다.
㈜풍영에도 노동조합이 있고 조합원들은 월 1,300원의 조합비를 꼬박꼬박 냈지만 노동자 권익을 위해 노동조합이 하는 일은 없었다. 노조가 하는 일은 ‘근로자의 날’ 수건이나 비누를 나눠주고 야유회나 교육 때 음료수를 노조 재정으로 보조하는 정도였다. 위원장은 장기집권을 하고 있었고, 전직 경찰관이었다. 조합원이 노동조합에 단체협약을 보러 가거나 회사에 대한 불만을 의논하러 가면 노조 간부들은 수사관처럼 굴었다.
< 사진: STV 부산여성사진전>
1985년에 임금이 인상되었다. 하지만 분명히 11% 인상되었다고 했는데 임금이 인상 전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유가 뭔가 따져 보니 그동안은 오전 8시부터 6시 30분까지, 8시간 근무를 기본으로 점심시간을 30분으로 계산하여 연장 2시간분에 대한 수당이 나왔는데 30분이 줄어든 것이었다. 노동자들의 항의에 회사 관리자는 “실제 일 한 시간은 9시간 반이다. 점심시간이 1시간이다.”라고 했다. 노조는 회사의 방침을 그대로 인정하였고 위원장도 회사 관리자와 같은 말을 했다. “점심시간 1시간은 불만 있는 자들이 단결해서 찾아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당시 대의원 선거는 공고도 제대로 하지 않고 조합원들이 알지도 못한 채 치러지기가 일쑤였다. 출마도 주임이나 반장들이 했고, 조장들의 무더기 투표로 대의원이 선출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평조원이 출마하여 당선되는 일은 거의 드문 일이었는데 7과에서 제화공 하봉순이 주임이나 반장을 누르고 대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후 하봉순은 관리자에게 ‘간첩’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억누르기만 해서 노동자들의 분노가 잠재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간첩’을 대의원으로 선출한 7과, 그리고 공정선거 시비가 붙어 실랑이를 벌였던 1과, 2부의 야학 출신들이 주도하여 30분 수당 지급에 대한 서명운동이 서서히 시작되었다.
여기에 회사에서 기름을 부었다. 서명운동을 눈치채고 1과 노조 대의원 후보였던 노득현을 가명으로 입사하였다는 사유로 해고시킨 것이었다. 노득현은 대의원대회장에 ‘나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세요’라는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였다. ㈜풍영에 나돈 최초의 유인물이었다. 며칠 후 ‘우리의 30분을 돌려달라’는 유인물이 현장에 돌기 시작하였다. 현장은 술렁거렸고 우리가 뭔가 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416명의 조합원이 서명하여 6월 1일 “4, 5월분 30분 연장수당을 지급하라, 점심시간을 규정대로 1시간으로 해달라, 기본급을 정부시책에 맞게 10만 원 이상으로 재인상 해달라”는 요구를 담아 노동부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점심시간은 즉각 1시간으로 조정되었다.
사건이 이렇게 마무리될 줄 알았지만 회사의 부당노동행위가 계속되면서 일이 커졌다. 서명대표자들이 노조 사무실로 몰려갔다. 노조가 책임지고 해결하고 회사에 압력을 가하라고 요구했다. 위원장은 “너희들은 법 다 지키고 사느냐, 근로기준법도 회사 사정에 따라 못 지킬 수도 있지.”라며 회사를 옹호했다. 다음 날 노조사무실에 위원장 면담을 하러 갔던 8명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노조위원장이 “해결하도록 노력하겠다.”고 해서 8시간 만에 면담을 마치고 돌아왔건만 회사에서 이들에게 사직서를 강요하고 하루 종일 사무실에 감금하여 협박하였다. “머리채를 뜯어서라도 쫓아내라.”
사직자들은 ‘강제사직 철회하라!’, ‘어용노조 물러가라!’는 유인물을 배포하며 출근투쟁을 시작하였으며 한편으로 각 기관에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전원 복직, 4, 5월분 연장수당 지급을 요구하며 회사와 교섭을 하기도 했지만 회사는 노동부와 경찰의 편파적 태도에 힘입어 점점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더니 결국 재입사도 안 된다는 통보를 하였다.
해고자 중 두 명은 노동부 북부출장소 근로감독관의 출석요구에 갔다가 경찰서에 연행되어 ‘유언비어 날조죄’로 구류에 처해지기도 했다. 해고자들은 [풍영소식]을 작성하여 배포하고 일일찻집을 열어 현장 노동자와의 연계고리를 만들려고 하였다. 일일찻집에는 회사 관리자, 기관원, 경찰이 더 많이 왔다. 이들은 참가자 리스트를 작성하고 다방 주인을 협박하여 일일찻집 개최는 결국 무산되었다.
< 당시 기사는 풍영 여성 노동자의 요구에 대해서는 보도하지 않고 위장취업 문제를 기사화했다.
_ 동아일보 1985.8.22>
이들의 투쟁에 관심을 갖고 함께한 단체는 1983년 생긴 ‘여성평우회’ 정도였다. 여성평우회는 노조의 방해를 뚫고 조합원들이 앞장서서 벌인 30분 쟁취투쟁 사례를 퍼뜨렸고 해고자들과 ‘노동3권 보장하라’며 거리행진을 함께 시도하다가 연행되기도 하였다.
7월말, 회사는 그동안 지급하지 않던 수당을 하기휴가 보너스 명목으로 1인당 15,000원~25,000원을 지급하였다. 현장은 승리의 기쁨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동조자’의 강제해고가 속출하였다. 강제잔업 연장근로를 반대하던 노동자, 진정서를 배포하던 노동자들이 이력서 허위 기재 등 갖은 이유로 해고당하였다. 관리자들은 불만을 이야기하는 여성 노동자를 불범감금, 폭행하였다. 신문에서는 ㈜풍영의 위장취업자 해고 기사를 내보냈고 회사는 이를 통해 현장 노동자와 해고자들의 고리를 끊으려 하였다. 투쟁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회사가 수를 쓴 것이다. ‘위장취업’이라며 투쟁에 앞장섰던 노동자를 축출하였고, 이들과 함께했던 이들을 사직하게 만들었다. 해고자들의 투쟁은 계속되었고 노동자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풍영 노동자들의 투쟁은 많은 해고자들을 낳고 현장으로부터 고립되는 결과를 낳았지만, 노동자들의 단결로 점심시간 30분을 쟁취함으로써 실질적 임금인상을 이루었고 투쟁하면 된다는 가능성을 심어준 부산 신발공장 최초의 승리였다.
출처: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부산지역실태와 노동운동], 민중사, 1986.
경향신문 1981.8.27.
동아일보 1985.8.22
매일경제 1989.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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